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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에 만나기로 한 친구가 오지 않는다. 이미 십오 분을 넘기고 있다. 늦는다고 연락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전화기는 움쩍도 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오지 않는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전화기에 눈을 두고 기다리나 요지부동 침묵할 뿐이다. 마냥 기다린다는 건 인내를 담보해야 하는 시간인가.
어느 가을날, 서울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낙엽이 떨어지는 남산을 걸었다. 수학여행 때 가보고 사십여 년이 흐른 세월을 더듬으며 가을의 호젓한 풍경 속을 걷다가 처음 보는 모습에 멈춰섰다. 남산타워 테라스를 따라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자물쇠. 그 앞에 선 두 쌍의 남녀가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연인끼리 사랑의 약속을 담아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열쇠는 찾을 수 없게 멀리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발상이 독특하다. 이름하여 ‘사랑의 자물쇠’. 이름이 아름다워 한 번 더 쳐다보았다. 하지만, 풍상을 견디고 눈비에 맞으며 주인의 사랑을 위하여 혹독한 기다림을 이어가. 어느 날에는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한 연인이 있을 것이고, 혹은 사랑의 약속만 내려놓은 채 기약 없는 이별을 하는 연인도 있을 것이다. 헤어지지 말자는 메시지를 담아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며 서로의 마음을 담아 놓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재미 삼아 걸어놓는 인스턴트 사랑은 없지 않나 싶다. 돌이켜보면 운명이라는 시간 중 기다림이란 시간대는 나에게 정말 얼마나 혹독했던가.
타인의 마음을 엿보듯이 자물쇠 하나하나에 눈길이 머문다. 어찌 보면 이런 표시라도 남겨야만 하는 이들의 심정이 이해되면서도 딱하기 그지없다. 쉬운 만남과 쉬운 결별에 만남과 헤어짐이 안겨주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 남아있기는 할는지. 어떻게 보면 쇳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자물쇠지만, 이런저런 소원으로 주문을 걸어 놓은 그 순간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리다.
달아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쇳빛이 그대로 살아있는 자물쇠와 녹이 슨 자물쇠가 “나는 기다리겠노라”고 하며 서로를 다독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기다림이라는 이 애틋한 풍경 속에 서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 보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가슴 두근거리는 첫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그를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던 단발머리 여고 시절은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기다림이었다.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그 사람과 말 한 번 나눈 적 없었지만, 안개 속에 아련히 비치는 불빛처럼 따스한 미소는 밤새워 무언가를 끄적이게 이끌었다. 사춘기 소녀의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어도 그 기다림은 어쩌면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결혼에 대한 로망을 품지만 내겐 그게 없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 중매가 들어오고 선을 보라고 했을 때, 엄중한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서울 언니네 댁으로 가버렸다. 다다른 혼사를 놓칠새라 걱정한 가족들은 나를 설득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설득이 통하지 않자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거짓말로 서울에서 내려오게 만들고, 나는 선을 봤다. 상대를 향한 가슴 떨림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은 결혼은 ‘인연이란 게 무엇인지’를 되묻게 했으나, 마침내 남들처럼 아이를 가졌다.
한 생명이 내 몸에 뿌리내린다는 건 충격과 신비로움을 안겨주는 경험이었다.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지독한 입덧에도 뱃속에서 꿈틀대는 생명을 느꼈다. 입덧은 고통이었으나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기쁨이었다. 내 아기의 탄생을 위해 처음으로 해보는 기도와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는 떨림은 결혼이 가져다준 고귀한 기다림이었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내기 위해서 기다림은 필연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울 듯이’, 메마른 들판을 적시기 위해서 천둥 번개가 치듯이, 연인과의 첫 키스를 간절히 원하는 가슴 떨림, 기다림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것들이 아닌가.
이십 대 초반에 사뮈엘 바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무얼 쓰고자 했는지 참으로 답답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왜 이런 재미없는 작품을 썼는지, 나의 변변치 않은 독서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미건조한 기다림의 연속, 두 남자가 기다리는 고도는 누구이며 무엇이었을까.
1977년인가 서귀포 시민회관에서 그 연극을 공연했다. 당시만 해도 서귀포는 전시나 공연을 접하기 어려운 곳이었는데 반가웠다.
벌거벗은 나무 한 그루를 배경으로 검은 모자에 검은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든 두 명의 남자가 전부인 단출한 무대. 날마다 날이 저물도록 오지 않는 고도를 두 남자는 포기하지 못한 채 기다린다. 책장을 넘길 때처럼 연극이 끝날 때까지 무거운 지루함이 층층이 쌓여갔다. 끝내 나타나지 않는 고도, 기다리다가 끝나버리는 연극은 가슴에 무거운 돌 하나 얹어놓았을 뿐이었다.
고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찾기 위해서 세 번을 더 읽었고, 해서 그들이 기다린 것은 ‘구원’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마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나는 그걸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닐까.
올해 달력을 걸어놓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유월이 문 앞으로 걸어온다. 저기 깊은 골 푸른빛 산수국 향기를 따라 내게 남아있는 기다림을 찾아 나설 궁리를 한다. 살아있음의 명분이 기다리는 것에 있기라도 하듯이.
정영자 수필가 / 서귀포문인협회 회장
